영원한 군인가족 -신혼생활(문정은)

영원한 군인가족 -신혼생활(문정은)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영원한 군인가족 -신혼생활(문정은)

0 1,999 2004.03.2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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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가을 군인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전쟁 끝이라 군인하면 군산 시내의 보충대를 연상하지만,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농민 사회보다는 총 들고 싸우는 군대 사회는 우리 처녀들의 호기심 끄는 미지의 사회다.
  이등중사(병장) 계급장을 단 사병과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우리 집에 왔다. 장교가 자기를 소개하는 데, 사회 물정에 물들지 않은 솔직한 언동이 마음에 든다.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으면 결혼을 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같이 헤쳐나가리라 마음먹는다. 중간에 사람이 끼고 편지가 몇 번 오간 연후에 1957년 음력으로 4월 7일 우리는 서로를 믿고 한 식구 가 된다. 당시는 왜정시대(倭政時代)의 습관이 남아서 양력보다는 음력이 통용되던 시대라, 지금도 옛날의 가정 행사는 음력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신랑은 논산 육군 제2훈련소 교관단에 근무하는 육군 중위다. 우리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대신 집에서 재래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친지와 하객(賀客) 30여 명이 둥글게 에워싸고, 이장(里長)인 덕삼(德三)이 읽어 내려가는 홀기(忽紀)대로 우리는 맞절을 하고 술잔이 오가면서 결혼식은 진행된다.
  결혼날의 초례청은 전통적인 풍습이라고 신기해 하는 옛날의 시골 풍경 그대로다.
  
  우인 대표들은 꽃다발과 축사로 시간을 끌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부락 사람의 시선을 뒤로 한 채 택시를 타고 신랑이 살고 있는 논산으로 떠난다.  
  나이 22이지만 시집 갈 나이는 아닌 데 혼처가 탐이 나서 결혼을 승낙한다. 친정이 시골이라 두레꾼의 농사짓는 모습만 보던 나에겐 아침마다 M-1 소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군인 대열은 신기하기만 하다.

  남편은 교관단에서 근무하는 교관인데, 결혼 한 달 만에 전방으로 전속 명령이 난다. 군인의 몸이라 남편은 나와 시어머니를 고향인 충남 예산에 남겨두고 홀로 임지로 떠난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 9월이 되니, 남편은 전방에서 휴가병을 보낼 테니 그 병사를 따라 면회를 오라는 편지가 온다.
  서울로 올라와선 용산에서 전차를 타고 청량리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남편이 근무하는 김화까지 가니 날이 저문다. 전쟁 끝이라 숙박시설은 없고 민가에서 하루 저녁을 묵는다.

  그 집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6.25 때의 전쟁 이야기를 들려 준다. 국군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와선 집을 강제로 점령하고 양식을 마음대로 취식(取食)하고, 한 집에 30명 정도가 들어와서 쉬다가 야간에 전투하러 나가면 한동안 총소리가 들리고, 새벽에 복귀(復歸)할 때면 2~3명 정도가 돌아오더라고 한다.

  김화에서부터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트럭을 탄 군인만이 출입이 허용된다. 헌병은 칼빙총을 어깨에 메고 도민증을 검사한다.

  강원도까지 왔으니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검문하는 헌병의 눈을 피해 부대까지 70리라고 하는 산길을 신발을 벗어들고 인적이 드문 신작로를 걷는다.
  이름 모르는 야생나무가 무성하고, 아름드리 칡넝쿨이 휘감겨 있으며, 나무 밑엔 다람쥐가 뛰어다니고, 땅바닥 파인 곳에는 도토리가 수북이 쌓여있다.  

  산에는 머루와 다래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나뭇잎이 빨강색 노랑색으로 단풍이 들어 꽃처럼 고왔으며, 이름모를 열매가 빨갛게 가지 가득히 달려 있다.
  간혹 초가집이 눈에 띄나 마당가에 쌓인 돌무더기와 무성한 잡초가 임자는 피난을 가고, 빈집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20리 정도를 걸었을 때 군인 초소가 나오며, 헌병이 도민증을 검사하고 있는데, 민간인은 더 이상 북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막는다.
  나는 군인가족이며 남편의 면회를 간다고 사정사정해서 승낙을 받고 헌병 검문소를 통과한다.
  해 질 무렵 부대에 도착하니 민간인이 살림을 히는 초가집 몇 채가 눈에 띈다. 위병소에서 면회를 신청하니 남편은 인접 부대로 검열을 나갔다고 하며 부대에는 없다.  
  같이 있는 소대장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데, 방에는 장롱이나 장식품은 없으며, 부엌에는 사과 궤짝을 엎어서 찬장으로 대용하고 있으며, 살림살이라고는 양은식기 몇 개만이 눈에 띈다.

  산골짜기엔 물이 흐르고 물소리가 정답다. 남편을 만나러 왔는 데 곧 온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오지 않으니 불안이 크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는데 어떤 군인이 와서 나를 찾는다. 달 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데, 방에서 들으니 귀에 익은 목소리다. 남편이 검열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밖으로 나가 남편과 시선을 마주치니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바라볼 뿐인데, 남편이 먼저 입을 열어 김 중위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 리 부부는 주인이 피난가고 비어있는 집으로 옮겨서, 부대에서 모포를 빌려서 잠자리를 준비한다.

  어두운 부엌에서 남편은 불을 지피고, 나는 옆에서 쌓였던 이야 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기쁘기만 하다.
  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잠을 청해보나 잠은 오지 않는다. 남편은 배가 불러 애기가 꿈틀거리는 내 배를 만지며, “신혼 생활도 못하고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좋아 한다.

  남편이 주번을 하면서 부대에서 못 나오는 날은 여자들끼리 한데 모여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운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군인가족들은 도둑은 없어도 인민군이 내려오고, 간혹 호랑이도 나타난다고 무서워한다.
  민간인에게 주소를 물으니,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라고 한다. 1주일을 묵으며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1957년 시집오던 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동내 오솔길은 눈으로 막히고, 샘에도 가지 못해 마실 물이 없어서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한다.
  전방에도 눈이 많이 와서 야간에 근무하던 초병의 희생자가 많이 났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불안한 가운데 남편으로부터는 소식이 없다.

  추웠던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니, 남편은 전속 명령을 받고 전방에서 후방으로 내려온다.
  군인의 전속은 임무 수행 상 출발 일자와 신고 일자가 여유있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날짜로 되어 있어 남편은 우리를 고향에 남겨두고 먼저 임지인 대구로 떠난다.
  남편이 교관으로 보직을 받은 한 달 후에 자리가 안정되자, 시어머니와 나를 데리러 온다.
대구 교외에 자리잡은 새로운 집은 팔달천 냇가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하고 공기가 맑다.  
  남편은 육군정보학교로 발령이 나서 교관 보직을 받는다. 군인이라고는 하나, 적의 침공을 경계하며 훈련을 하는 전방의 야전부대가 아니라 후방에서 행정지원을 가르치는 군사학교다.

  1958년 봄 남편은 군사지식의 보충을 위해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으로 입교 명령이 난다.
  우리는 남편을 따라 광주로 가야 하지만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누워있기 때문에 대구에 남아있고 남편 혼자서 광주로 떠난다.  

  교육 중에는 토요일 밤차로 송정리를 출발하여 일요일 새벽에 대구에 도착, 집에 와서 잠깐 식구들 얼굴을 보고 몇 시간 같이 있다가 밤차로 대구를 떠나면 월요일 새벽에 송정리역에 하차 하여 교실로 들어가면 교육 개시 10분전이라고 한다.    
  남편은 교육기간 중에 주말이면 대구를 오가면서도 무사히 4개월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전쟁 중에는 정보학교가 대구 달성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썼는 데, 휴전이 되고 정세가 안정되자 2군 야전공병단에서 영천에 학교 건물을 세우고, 대구와 경주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정보학교와 부관학교, 헌병학교와 경리학교를 영천으로 옮긴다.
  
  대부분의 장병들이 학교를 따라 이사를 가니, 영천은 하루아침에 군인이 북적대는 군사도시로 변한다.
  우리도 학교를 따라 영천으로 이사를 가야 하지만 시어머니 병환 때문에 대구에 남아서 영천으로 출퇴근을 한다.  
  봄이 돌아오니 남편은 2개월의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광주로 떠나고, 시어머니와 나는 대구에 남는다.  
  
  2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교육을 받을 때 입었던 작업복을 빠는데, 바지 무릎이 철사로 얽어매어 있어서 훈 련을 받을 때 떨어진 바지를 입고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안쓰러운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10일간의 휴가를 받은 남편은 나를 데리고 하루 종일 대구 시내를 누비며,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사진관에서 기념 촬영도 하고, 동촌 유원지로 가서 모래 사장을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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