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는 떠난다

전우는 떠난다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전우는 떠난다

0 10,313 2007.11.04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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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여름(2007.6.16) 서울에 사는 상호 동기생 심 중령(沈榮秀 中領:豫備役) 가족으로부터, 심 중령의 집들이(安葬式)를 대전에서 한다고 초청장이 왔는데, 심 중령은 지난 ‘안보 관광의 날(2006.9.19)’에 만났을 땐 “집을 떠나온 지 60년이 지난 이제야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며 미소 짓던 그가, 사업을 중단하고 고향(평안북도 신의주)으로 가는 소원을 단념한 채, 대전에 있는 집(현충원)으로 내려간다.
  심 중령은 16세 되던 해에 평안북도 신의주 중학교 2학년(舊制)에 다니다, 반공운동(신의주학생사건)에 가담(1945.11.23)했다는 죄로 공산당의 검거가 시작되자, 단신으로 38선을 넘어(1945.12) 서울로 와서, 낮에는 신문을 팔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모진 고생을 하다, 국방경비대에 사병으로 자원입대(1947.5)하여 38선 바로 밑(경기도 웅담읍 감악산)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복무를 하다 인민군의 남침(1950.6.25)으로 전투를 하며 경북 대구까지 밀리며 부대 근무를 하던 용사다.
  다부동(경북 칠곡군) 방어선을 지키며 인민군의 대구 침공을 저지하던 심 중령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UN군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자 아군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고, 그가 속했던 부대(육군 제2사단)도 평양을 거쳐 운산(평안남도)까지 다녀오는 길은 가시밭길이었으며,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은 험악한 길이었다고 머리를 썰레썰레 내두르고, 장교로 임관되어 20여 년간 전후방 각 부대를 돌며 조국을 지키다 군복을 벗고(1977.3)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30년을 지내다 생을 마감한다.
  현충원 제단(祭壇) 아랜 200여명의 유가족이 손을 모으고 경건히 의자에 앉아 있고, 단상 제단에는 태극기를 입은 18명의 노인들이 앉아서 현충원장이 마이크 앞에 서서 노인들이 나라에 바친 충성심을 찬양하고, 노인들은 현충원장의 조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
불교 의식으로 제사를 올리고, 승려의 독경을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영현 봉송병의 가슴에 안겨 천천히 제단을 내려와 묘역으로 향한다.
  장송 행렬이 장교 묘역과 사병 묘역으로 갈리는데, 장교 묘역으로 향하는 호송병은 세 사람으로, 상호도 장송(葬送) 행렬의 뒤를 따라가며, “심 중령은 젊어선 고생을 했을망정 나라를 위해서 영광되고 보람 있게 살다 간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장교 묘역에서 유골 안장의 제사를 지내고, 정문을 나서며 넓은 들판을 바라보니, 나라의 부름(召集令) 받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떠나며 심은 번영나무 묘목이 비와 서리를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서, 뒤따르는 군의 후배뿐 아니라 일반 사회의 시민들까지 열매를 따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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