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2005. 6. 16) 서울에 사는 동기생 심 중령(沈榮秀 中領:豫備役) 가족으로부터 초청장이 왔는데, 지난번 심 중령을 만났을 땐 집을 떠나 온 지 60년이 지난 이제야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며 미소 짓던 그가, 대전에 집(國立墓地)을 마련하고, 가족으로부터 집들이(安葬)를 한다고 초청장이 왔기에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는 16세 되던 해에 평안북도 신의주 중학교 2학년(舊制)에 다니다, 반 공운동(신의주학생사건)에 가담(1945.11.23)했다는 죄로 공산당의 검거가 시작되자, 단신으로 38선을 넘어(1945.12) 서울로 와서 학교에 다니며 모진 고생을 하다, 국방경비대에 사병으로 자원입대(1947.5)하여 38선 바로 밑 (경기도 웅담읍 감악산)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복무를 하다가 인민군의 기습(1950.6.25)으로 전투를 하면서 경북 대구까지 밀렸다고 한다.
다부동(경북 칠곡군) 방어선을 지키며 인민군의 대구 침공을 저지하 다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UN군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자 아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고, 그가 속했던 부대도 여러 전선을 거치며 평양을 거처 운산(평남)까지 다녀오는 길은 가시밭길이었으며,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은 길이었다고 머리를 썰레썰레 내두르며 27년간 전후방 각 부대를 돌며 조국을 지키다, 군복을 벗고 (1977.3)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나와 같이 일본 식민지 시대에 나라 없는 설음을 겪고, 조국이 해방 되자 살기 좋은 나라를 세우겠다고 여러 분야에서 뛰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살아있는 사람도 몇 사람 안 남았다.
부지(敷地)가 넓고 현대화된 대저택(大邸宅)에서, 집들이잔치(安葬行事)를 하고 집을 나오며 넓은 들판을 바라보니, 나라의 부름 받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떠나며 심은 번영나무 묘목이 비와 서리를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서, 뒤따르는 후배들이 열매를 따 먹고 있다.
주권을 찾은 지 60(還甲)여 년, 동족끼리 싸워야 했던 6.25사변이 발발 하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 속에서 총총히 들어선 고층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전개되는 상황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참고;다부동전투(1950.8.3~9.22)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방어선을 설정하고,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군 제1사단과 미 1기병산안이 대구로 침공 하려는 북한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의 대구 침공을 저지한 전투로서, 미군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으로(1950.9.15) 반격을 개시한 전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