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미 육군정보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근무처를 영천 정보학교로 명령을 내서 우리는 또다시 경북 영천으로 이사를 간다.
1966년 가을이다.
계절이 바뀌자 큰아들 성훈이와 작은아들 성현이가 홍역에 걸 려 두 아이를 번갈아 업고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는다. 홍역에 걸렸다고는 하지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니 순하게 홍역을 치 렀으나 다른 병보다는 열이 심하다.
하루는 아이들 마실 우유가 없어 약국으로 갔는데, 약국 주인이 여학교 은사이신 차영희(車英犧) 선생이다.
과학을 가르쳤는데, 약대를 나와 약사 자격증을 살려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학생 시절 선생님이 사모님과 연애할 당시를 소개 하는데, 감명 깊게 들은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는데, 객지에서 은사를 만나니 친정아버지를 만난 듯이 반갑다.
1968년 가을 육군정보학교가 영천을 떠날 때까지 선생님은 나를 친 자식처럼 귀여워하셔서, 그 은혜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1967년 봄에 남편은 광주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하고, 나와 아이들은 영천에 남아 남편의 교육 종료를 기다린다.
남편이 없는 집은 쓸쓸하며 객지에서 홀로 집을 지키려니 사람의 그림자가 아쉽다.
큰아들은 걸리고 작은 아들은 업고서 아랫집 송식(池松植)이네로 놀러 간다. 큰아들은 마당에서 뛰놀고 작은 아들은 마루에서 기분 좋게 기는데, 우유를 소화시킨 액체를 마루 위에 쏟아 놓는다.
물 같은 배설물이 마루 틈으로 스며들고, 그 광경을 본 그 집 처녀 순자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웃는 얼굴로, 판자 사이에 스며든 배설물을 송곳으로 후벼내던 기억이 새롭다.
일요일이면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도 올라가고 개울에도 놀러가서 하루를 보낸다.
남편은 이 넓은 땅, 많은 집에서 우리 네 식구가 기거할 방 한간 없다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다.
여름 무더운 날에는 영천에서 포항 해수욕장까지 가서 해수욕을 즐긴다.
아이들은 물 속에서 잘 놀았으며, 우리 부부도 헤엄을 치며 즐겁게 놀았다. 남편은 수영을 잘했고, 나는 수영을 즐기며 어린 소녀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우리 식구들은 바닷가에서 즐거웠던 만큼이나 피부를 데었으며, 밤이 되면 식구들은 무더운 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려 나는 부채질을 하느라 잠을 설치곤 했다.
1968년 봄이다.
남편은 진급을 단념하고 하는 데까지 군대생활을 하다가 나가라면 나가서 생활방도를 찾겠다고 했는데, 5월 1일부로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을 한다.
12월이 되니 영천에 있던 4개 학교가 서울로 이동을 하고, 그 자리엔 육군 제3사관학교를 창설한다고 한다.
1968년 12월 19일, 군 수송열차로 야간에 영천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객차 안에서는 돌아가며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는 동안, 서울역엔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서 도착한다.
우리는 돈이 모자라 시내에선 방을 얻지 못하고 상계동 골짜기에 5만원을 주고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간다.
시내에서 방을 얻으려면 20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수중엔 20만원이 없다.
영천에선 저녁에 전기불을 켰는데, 상계동에 와서는 남포불을 쓰게 되니, 아이들은 “가짜 서울”에 왔다고 해서 우리 부부는 한바탕 웃었다.
남편은 아침 여섯시에 상계동을 출발하면 남한상성 육군 행정학교에 도착하며, 버스를 두 번, 군용트럭을 한 번 갈아타며 출퇴근을 하느라 고생이 심했다.
이웃에는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있고, 윗집은 조그마한 암자이며, 상계동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빈민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