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병의 독백 - 식민지정책과 우민(愚民)정책

[3] 노병의 독백 - 식민지정책과 우민(愚民)정책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3] 노병의 독백 - 식민지정책과 우민(愚民)정책

0 3,928 2003.08.1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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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병의 독백 - 식민지정책과 우민(愚民)정책

일본인 실업자의 한반도 진출
 
사람은 출생으로부터 사망 시까지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일본 식민지 하에선 뚜렷한 목표나 희망도 없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날그날을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하던 우리 민족에겐, 위(里長)에서 떨어지는 명령과 지시가 절대적이며, 항의나 변명이 필요 없이 처해진 환경과 닥쳐오는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식민지 국민의 운명이오, 순리다.

상호 호적엔 1930년 12월 24일 강원도 춘천읍 약사리 25번지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출생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상호가 기억하는 것은 5살 때 춘천초등학교 밑에 일본말로 아사히마찌(旭町)에 위치한 초가집이다.
1930년대 사회상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정착되고, 농토와 기업체는 대부분 일본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소유로 넘어가고, 농토 없는 농민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전국을 떠돈다.     
일본은 본토보다 국토의 개발이 늦은 한국을 목표 삼아 정부에서 자금을 융자해주며 일자리 없는 일본 사람을 관부(下關-釜山) 연락선에 태워 한국으로 내몬다. 한국에 온 일본 사람이 본토인에 비해서 비교적 무식하고, 수준 이하의 인간 행동을 한 것은 다분히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도 그 이유가 포함 됐다고 본다.

행정권과 경제권은 일본 사람이 좌지우지 하고, 국토의 개발권은 일본 사람이 독점하며, 각급 기관장도 일본 사람의 몫이오, 한국 사림은 여러 기관의 하급 관리와 국토 개발의 목표 달성을 위한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일본 정부에 농토를 수탈당한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객지를 전전하며 돈벌이를 해야 한다.

별다른 기술이 없는 한국 사람에겐 일용직이지만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노가다판'이다. '노가다판’에서 적응 못하는 농민과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는 지식인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중국의 동북방에 위치한 일본의 괴뢰정부)의 북간도나 중국 본토, 러시아의 연해주와 바다 건너 미국 하와이의 사탕 농장과 본토로 가서 노동을 하거나 독립 운동을 한다. 지금 해외에서 고려족이다, 조선족이다 하고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것은 모두가 해방 이전에 조국을 등진 시림의 후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에 외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중국에 200만 명, 러시아에 50만 명, 일본에 15만 명이 있다.
국내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노동자와 농민이 되고,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공장 직공이나 자영업에 종사하며, 중학교나 대학교를 나온 고급 인텔리는 산림간수나 금융조합의 서기, 은행창구 직원과 초등학교 선생이 갈 수 있는 직장의 전부다.

한국 사람이 월급쟁이가 되었다는 것은 특수층의 대명사로 가문의 영광이오, 본인에겐 커다란 출세다. 상호 아버진 가세가 기울어진 양반집 가정에서 태어나(1901) 어린 시절을 충남 예산에서 보내다가 청년이 되면서 고향을 떠나 전국을 전전하며 살길을 찾다가 강원도 춘천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온 일본 사람이 정부에서 돈을 빌려 '노가다판'을 개설하는 데, 일본 사람(勝田幸一)이 경영주요, 사위(渡邊武雄)가 사장이고, 일본인 청년 형제(宮崎隆次, 宮崎奎一)가 인부를 감시하는 감독이며, 한국인(李啓鈺) 십장이 공사의 진척과 완공을 책임지는 사람이오, 상호 아버진 삽과 곡괭이를 잡고 땅을 파는 노동자다.

상호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동생이 함께 사는 초가집 단칸방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앞줄 우로부터 상호, 여동생, 뒷줄 우로부터 상호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이제 소양강 방수제 공사도 끝나고 다음은 춘천에서 양구까지 신작로(新作路)를 닦는 일인 데, 일당이 2원이 넘는다고 하니 회사가 맡은 일감을 따라 우리도 같이 가자”고 상호 아버지가 낯선 남자와 의론하고 있다. 새로 생긴‘노가다판’은 춘천에서 양구까지 사람이 다니는 오솔길을 산을 깎고 골짜기 위로 다리를 놓아, 사람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내는 일이며, 공사가 준공되기까진 10여 년이 걸린다고 하며, 공사가 완공되면 춘천에서 양구까지의 거리가 보다 가까워지며, 천지가 개벽되는 변화가 온다고 한다.

항간에선 이 공사를 가리켜 춘천에서 양구까지 도로를 개설한다고 해서 “춘-양도로 개설공사"라고 부르며, 1937년 봄엔 공사 현장이 춘천읍에서 100여 리나 떨어진 춘천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뻗는다.

상호 아버진 '노가다판'에서 노동을 하고, 상호 어머닌 인부의 숙식을 책임지고, 공사장 부근에 통나무로 집을 짓고 20여 명이 한 방에서 숙식을 하며, 인부들은 공사장에서 삽과 곡괭이로 길을 닦는 노동을 한다. 공사를 하다가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면 남포(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려 바위를 제거한다.

‘노가다판 인부의 하루 임금이 2원 20전이라, 저녁 때 나눠주는 ‘맘보딱지(傳票)’는, 액면에 적힌 액수대로 현금 구실을 하며 공사장 부근에서 현금과 같이 유통된다. 인부들은 하루 3끼 밥을 먹으며 통나무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50전짜리‘만보딱지’로 숙식비를 지불하면‘한바’주인은‘만보딱지’를 모았다가 월말이면 공사 현장 사무소에 가서 현금으로 교환 한다.

한바는 3집으로 밥집 아주머니 고향 이름을 따서, 인부들은 원주집 일꾼, 가평집 일꾼, 안동집 일꾼으로 부르는 데, 상호네 집 일꾼은 상호 어머니 친정이 원주라 원주집 일꾼으로 부른다.

1925년부터‘가츠타쿠미’의 '노카타판’을 따라다닌 상호 아버진, 한문을 배우고 보통학교 4학년까지 다닌 덕으로 일본말을 할 수 있어 ‘춘-양 도로’의 개통공사가 한창이던 1930년 봄에 노동자에서 수첩과 도면(設計圖)이 들어있는 빨간 가방을 허리에 차고 인부를 지시하는 십장(什長) 자리에 올라, 임금도 일당 2원 20전이 아닌 월급 100원을 받는다.‘춘-양 도로’가 완성되자 상호네 회사(勝田組)에선 도(道) 당국으로부터 춘천의 발전을 가로막는 산(사창고개)을 허물어 춘천역의 부지와 광장을 조성하는 공사 청부를 따낸다.

일깐(工事場)은 강원도 오지에서 춘천 시내로 옮겨와서, 사창고개 산을 허물어 역의 부지와 광장을 조성하는 공사를 시작한다. 흙을 도록코(壙車)에 싣고, 도록코에 뛰어오른 인부가 지렛대를 잡고 “나간다아”하면, 목에 두른 흰 수건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보기에도 시원하고 멋지게 보인다. 도록코에 탄 인부는 광차가 멈추는 궤도 끝 광장에서 흙을 부리고, 30전짜리 전표(傳票)를 받곤 도록코를 밀고 광장 위로 올라간다.

1940년 인구 4만 명의 춘천읍은 도청 소재지답게 다른 도시보다 인구도 많으며, 각종 문화시설도 많다.

교육 기관도 유아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이 하나가 있고, 초등 교육기관은 둘인 데, 한국 사람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本町公立國民學校)와 일본 사람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綠丘公立國民學校)가 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농토는 일본 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 소유로 넘어가고, 농민은 농토가 없으니 농업은 마비되고 경제체제가 붕괴되며 사회는 빈궁하다. 일본 정부의우민(愚民)정책으로 국민은 무식하며,
한국인이 배우는 것을 환영하지 않으니, 입학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졸업을 한다고는 보장을 못한다. 양복을 입고 활동하는 어린이는 전체의 3분의 1이오, 나머지 3분의 2는 한복을 입은 어린이다.

한국 어린이가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에 못 들어간 어린이는 초등학교에 부설된 4년제 간이학교(簡易學校)에 들어가야 하고, 간이학교에 못 들어간 어린이는 평생을 무학으로 지내야 하는 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어린이가 4분의 1은 넘는다. 지금 노인들 가운데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노인이 많은 것은 일본 정부의 우민(愚民) 정책의 영향이며, 특히 여자가 많은 것은 이들 자리를 남자가 침범한 데서 오는 결과다.

한국 사람의 교육열이 높은 것은, 옛날에는 공부를 해서 벼슬길에 올라야 가난을 면하고,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우민 정책으로 한국 사람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없어서 못 배운 한풀이가 민족성으로 변했다.   

초등학교를 지원하는 어린이는 숫자는 많은 데, 입학을 허락하는 숫자는 적으니 탈락하는 어린이가 생긴다.

입학을 허락하기 위해서 선발시험을 치르는 데, 한 가지 예를 들면 기차 그림을 그려 놓고 연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바람이 어는 쪽에서 부느냐”라고 묻는가 하면, 기관차를 가리키며 “기차가 어느  쪽으로 달리느냐”라고 묻는 선발시험인데, 기차를 보지 못한 어린이에겐 어려운 질문이오, 시험이다.

1937년 3월에 상호도 초등학교 선발시험에 응시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한다. 상호 어머닌 집안 형편이 상호를 초등학교는 가르칠 수 있는 형편이라, 선발시험에 또 낙방이 되면 어쩌나 하고, 1938년 2월 선발시험 2일 전에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이 난 한국인 부교장(金東根)을 찾아가서 입학을 애원하여 배려를 약속 받는다.       

일본 식민지시대라 학교에서 한국어는 사용이 금지되고 처음부터 일본어만을 사용하는 데, 말뜻을 모르면 담임선생이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1,2학년의 저학년 담임은 의무적으로 한국인 선생이 맡는다.

1938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여름이다. 체조 시간에 웃통을 벗고 대오를 지어 뛰는 데, 누군가가 열중에서 작은 목소리로 “송키테이…, 송키테이”하고 뛰니까 모두가 “송키테이…,송키테이”하고 따라서 속삭인다. 말뜻은 몰라도 '송키테이'라는 구호는 구보와 관련된 단어로서 일본 선생이 들으면 체벌을 받는다는 막연한 지식은 가지고 있어서, 일본인 선생이 무서워 모두가 큰 소리로 외치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니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경기에서 양정중학교에 다니던 손기정 학생이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우승을 했는데,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춘천까지 전해져, 모두가 막연하나마 그 사실을 알고 속삭이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초등학교에 진학 못한 어린이는 4년제 간이학교를 선택하고, 중학교에 진학 못한 어린이는 초등학교에 부설한 2년제 고등과로 진학한다. 중등 교육기관으론 중학교와 농업학교가 있으며, 고등 교육기관으론 농과대학이 있다. 사회 편의시설로는 대중목욕탕이 하나에 여관이 둘,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단양대(丹陽臺)라고 부르는 공설 운동장에서 무성 영화를 상영하고, 자동차를 수리하는 ‘서비스’공장이 하나에 강원도립 춘천병원이 있다.   

1939년 7월이다. 오전에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데, 기관차 앞에 꽃을 장식한 기차가“삐익”하고 기적을 울리며 공진내(孔之川) 다리를 건너온다. 수업을 가르치던 선생이나, 학생들은“우루루”밖으로 나가 처음 보는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환호를 한다.

같은 해 8월, 일본정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1940년 2월에는 창씨(創氏)제를 실시하여 단성(單姓)을 쓰던 한국 사람에게 복성(複姓)을 쓰게 하며, 1941년 12월 8일에는 미국, 영국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동화(同化)정책을 시행하며, 젊은이를 전쟁터인 북지(北支)와 남양군도, 남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내몰더니, 1944년 1월에는 학병제(學兵制)를 실시하여 한국인 대학생을 전쟁터로 내몬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0년 가까이 되지만 지금도 '사할린'섬에는 전쟁 때 징용으로 끌려간 젊은이가 늙어서 손자와 손녀를 보도록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며, 남태평양 여러 섬에는 군인으로 끌려간 젊은이가 원주민 여자와 결혼해서 늙도록 어업을 생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태국과 중국에는 군인 위안부로 끌려간 처녀가 할머니가 되도록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망향의 설움을 달랜다.

춘천의 우두산(牛頭山-해발 100m)은 일본의 신화(神話)에 나오는 동산으로,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가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는데, 한국의 하늘을 나르다가 구름 아래를 보니, 산세가 좋고 물이 맑아 우두산에 내렸다고 한다. 우두산에서 멀지 않은 소양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니, 주민들이 머리가 여덟 개나 달린 뱀(야마타노오로치)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어,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칼을 뽑아 뱀을 퇴치하고 백성이 잘 살도록 했다는 신화가 있는 데, 이곳이 바로 춘천의 우두산 일대라고 하며 신성시 한다.

신사(神社)도 경성신궁(京城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은 총독부에서 관리하는 관폐대사(官弊大社)로서, 경성신궁은 한국의 서울에 있는 신사요, 부여신궁은 옛날에 백제와 일본이 형제지국으로, 백제의 옛 도읍지에 있는 신사라 총독부에서 관리한다. 춘천에 있는 강원신궁은 춘천이 일본의 옛 신화에 나오는 고장이라, 신성시 하여 도청에서 관리하는 관폐소사(官幣小社)로 지정한다. 서울에서 전차를 타고 경성신궁 앞을 지날 때는, 차장의 지시에 따라 모든 승객이 경성신궁이 있는 쪽을 향하여 머리를 숙여야 하고, 강원신궁은 모든 학생이 하교 길에 반듯이 찾아가서 재배를 하고 손뼉을 치며 기도를 해야 한다.

어린이는 뜻은 모르지만 매일 하교 길에는 신사에 들려 신체를 모시고 있다는 거울 앞에서 손뼉을 두 번 치고 머리 숙여 기도를 드리곤, 간누시(神主)로부터 도장을 받아선 다음날 아침 담임선생에게 보인다. 60년이 지난 지금 춘천은 인구도 7배 이상 증가한 30만이오, 오지라고 불리던 고을이 산천이 수려한 관광 도시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기타 편의시설이나 교육시설도 첨단을 달린다. 60년 전에는 산세가 험하고 개발이 늦은 강원도에선 도로공사가 한창이오, 공공기관의 건물 신축이 활발하다. 신작로라는 단어도 이 때 생긴 신조어(新造語)다.

춘천역의 부지와 광장을 조성하는 공사에 참여한 상호 아버지는 1941년 봄에 일본인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해서 산판업(木材販賣業)을 개업한다. 강원도 정선(旌善)에서 아람들이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사서, 여름 내내 소나무를 베어 냇가(朝陽江)에 쌓아두고, 겨울이 지나 얼음이 녹으면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운반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데, 1942년 봄에 크게 내린 비로 냇가에 쌓아 둔 소나무는 하류로 떠내려가고, 수중에 무일푼이 된 상호 아버진 떠내려간 나무를 생각하며 병원 침대에 누웠다가도 “내 나무..., 내 나무”하고 벌떡 일어나는 화병(火病)에 걸려 강원도립 춘천병원에서, 1942년 4월 17일, 42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註 1. 상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61년이 지난 2003년 9월 하순에 찾아온 태풍“매미”호가 전국을 휩쓸며 농토와 가옥을 앗아가고, 부산항의 고층 기중기를 무너트렸다는 TV뉴스 보도에서, 1942년에 정선지역에 내린 홍수를 짐작케 한다.   

2.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일본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1908년 설립한 일본의 특수국책회사임.
3. 십장(什長)     
도로공사 현장에서 인부를 지휘하여 설계도대로 공사를 진행시키는 현장 책임자임.
4. 노가다판(土方坂)     
일본어인 도카다(土方)가 노가다로 한국어화 된 단어로서 일본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와 농민이 살기위해서 토목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는 공사 현장을 말한다.
5. 00쿠미(00組)     
일본어로서 일본 사람의 폭력 조직이나 노동자 조직의 대외 명칭임.
6. 만주(滿洲)국과 북간도(北間道)     
1932년 3월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중국의 북방지역에 세운 괴뢰정부를 만주국이라고 하며, 북간도는 만주 동남부지역 압록강 대안(對岸)의 미개척 지대를 말하며, 한국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농업과 독립운동을 하던 광활한 지역으로, 소설의 활동 근거지로 자주 인용되는 지명임.
7. 한바(飯場)       
밥집의 일본말임.
8. 문맹(文盲)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며 기뻐하는 것은, 일본식민지 시대에 자신은 배울 기회를 놓치면서 해방이 되자, 아들 손자를 다 가르치고 이제 배울 기회가 있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딸과 며느리 같은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우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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