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니 습기찬 무더위는 가고, 맑고 깨끗한 공기와 더불어 등으로 내리쪼이는 햇볕이 따갑게 느껴지며,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접어든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화천에서 살고 있는 큰아들 집으로 떠난다.
서울에서 화천까지는 ‘아스팔트’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포장도로라 1일 생활권으로 당일치기가 가능하지만, 옛날에는 먼지를 뒤집어쓰는 멀고도 험한 신작로 길이라, 며칠을 걸어야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길 양쪽에는 빨강색과 노랑색의 ‘코스모스’가, 김상희가 노래한 “코스모스 한 들한들...,” 하고 노래한대로 흐느적거린다.
화천에서 신혼살림을 하는 며느리가 갖고 싶어 하는 가구 몇 가지를 화물차에 싣고, 화천을 향해서 떠난다.
군대생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들 부부보다는 손자인 원재와 손녀인 수진이하고 같이 살 수 없는 처지가 애처롭다. 코스모스 피는 계절이면 군대생활을 하는 남편의 면회를 위해 서, 버스를 타고 경춘가도를 달리던 추억이 즐겁게 떠오른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에는 사랑과 그리움이 짙게 깔려있고, 남편의 면회를 위해서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를 하던 지난날이 그립기만 하다.
오랫동안 입었던 푸른 제복을 벗고 넥타이로 갈아매던 그날은 기대와 보람, 불안과 당혹감이 교차되던 날이다.
새롭게 출발하는 직장도 국록을 먹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직장이라는 데에 다소의 안도와 위안이 된다.
16년간을 서울 사당동에 살면서 남편은 활기 있는 직장 근무를 하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았다.
남편이 국외로 멀리 나가고 없는 사이에 집을 단층에서 2층으로 증축에 착수한 나는, 일꾼들의 먹거리를 대랴, 건축 자재를 마련하랴, 행정서류를 완비하랴, 근심과 걱정, 고생도 많았다.
이웃 주민들의 건축 반대와 항의하는 행위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며, 아웃 주민이 원망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은 뇌출혈로 쓸어져 투병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성장한 곳이오, 자기가 살던 집이라 옛날 생각이 나고 그리울 때면 옛집을 찾아가서 담장 밖에서 집안을 넘겨다보곤 했다고 한다.
사당동의 단독 주택에서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와선 집 앞에 공원이 있어 5년간을 운동으로 보낸 현재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으나, 이것도 집 가까이에 공원이 있고, 남편의 꾸준한 운동과 투병의 결과다.
아파트는 문만 닫으면 앞집과도 교류가 단절되는 형편이지만 이 문제는 매월 열리는 반상회가 해결한다.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사회봉사도 생각하고 남편의 이해가 있으니 일 하기가 수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