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을 영어공부를 한 남편은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으로 전속하여 신병 중대장으로 보직을 받고 자리를 잡는 몇 달 동안을, 나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기다린다.
남편이 보직을 받고 자리가 잡히자 아들 성훈이와 함께 기차로 춘천까지 가서, 남편의 마중을 받으며 버스로 홍천까지 가는데, 산을 꼬불꼬불 도는 신작로는 길이 험해서 버스가 전복되지 않나 긴장이 된다.
1964년 여름에 가평 하사관학교를 나온 분대장이 보직을 받자마자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는 길에 영등포역 철길을 건너다 기관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역사(轢死)한다.
남편은 시신을 부대로 운구하고, 가족에 연락해서 성대히 장례를 치르는데, 비용 드는 것을 부대 예산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우체국 저금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인출해서 장례를 치른다.
남편은 부대를 지휘하며 중대원을 다스리기 위해, 회식도 시켜주고, 선임하사와 향도 등 간부들에게는 수고한다고막걸리를 받아다 같이 마시고, 명절 때는 떡을 해서 중대원에게 나눠주며 교육을 받느라 고생한다고 위로를 한다.
군대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200명 가까운 중대원은 연령의 다과를 불문하고 중대장이 관심을 가지며, 중대 간부들의 가정생활은 중대장이 보살펴야 한다.
하루는 남편이 주번을 하며 권총을 차고 민간인의 노름방을 습격 한다며 밖으로 나가려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민간인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라고 말렸더 니, 남편은 동갑인 인사계가 동네 노름에 따져 3개월간 집으로 봉급을 가져오지 않아 가족이 어렵게 산다며, 중대장 이름으로 군인을 상 대로 노름을 하지 말라고 위협을 준다며 밖으로 나간다.
인사계를 상대로 한 동네노름은 그치고, 며칠 뒤에 인사계 부인 이 집으로 찾아와서, “중대장님 덕분에 남편이 노름을 끊고 봉급을 집으로 가져올 수가 있어서 생활이 안정 되었습니다” 하고 사의를 표하고 돌아간다.
1년간의 신병중대장직을 무사히 마치고 소총중대인 2중대장의 보직을 맡고, 우리는 다시 새로운 부대 근처로 이사를 간다.
겨울이 돌아오니 날씨는 추워서 벽에는 성애가 끼어 수저로 얼음을 긁어내고, 문고리를 잡으면 짝짝 손에 달라붙는다.
강원도 추위는 매서웠다. 남쪽에는 꽃이 피었다는데, 강원도에선 3월이 가고 4월이 돌아와도 봄소식은 감감한 채 눈이 내린다.
추운 강원도에서 둘째아들을 낳았는데, 난산이 두려워 미리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국군병원에서 근무했다는 군의관 출신으로, 친밀감을 가지고 친절이 응대하며, 출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한다.
해산은 그 병원인 홍제병원에서 낮 12시에 무사히 몸을 푼다. 가족에게 집안일을 맡겨놓고 홍천읍 탄약고 경비에 나간 남편은, 집으로 나올 시간이 없어서 나는 병원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한다.
점심 때 출산한 아기가 호흡을 않더니 저녁 어둘 무렵에야 호흡을 시작한다.
세월이 흐르니 추웠던 강원도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와 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고, 들에는 농부의 소모는 소리가 들옄 가득히 메아리친다.
강원도에는 오래 살지 안했지만 정이 들고 마음에 들었는데, 남편이 도미시험에 합격하고 모자라는 영어를 보충하기 위해서, 강원도 홍천에서 경북 영천에 있는 육군 부괸학교 군사영어반으로 입교 명령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