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도와 새로운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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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신분제도와 새로운 명칭

0 2,601 2003.10.12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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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분제도는 부족 사회 때부터 있었으며, 어떤 신분과 가문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고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高宗 3) 이후 신분 계급이 타파되고, 신문화의 유입과 민족적 자각으로 신분 제도의 그림자는 희미해졌으나, 일본 식미지시대까지 남아 있던 신분제도의 잔재는 해방과 더불어 미군이 상륙하고,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민주주의의 발달과 함께 살아진 줄 알았으나, 지금은 새로운 이름으로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6.25사변 전까지는 특권층과 빈곤층, 혹은 상류 사회와 하류 사회로 분류 하더니, 1970년대로부터 상류 사회와 중류 사회, 하류 사회로 분류 하던 사회 구조가, 1989년 이후 IMF의 여파로 중류 사회가 무너지고, 다시 상류 사회와 하류 사회, 혹은 특권층과 빈곤층으로 분류 한다.
  
  나는 74세의 노인이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가시밭길을 걸으며 국립묘지에서 편안히 눕지도 못하고, 교도소에서 생활의 걱정을 모르며 오직 달력만 쳐다보고 지내지도 못하며 평생을 살아 남았다.
  양반 계층은 권리는 챙기되 의무는 회피하고, 민초는 권리는 없으면서 의무는 강요받는 계층이다. 나는 해방이 되고 50여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도 제 길을 걸어간다고 기뻐하고, 회고록의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다시는 우리나라가 내가 걸어온 시대와 같은 불행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에서, 경제성을 떠나 내가 살아온 과거를 회고록을 써서 국민에게 알리고 출판까지 생각했는 데, 어제(2003. 10. 10)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최도술이 SK자금 수수의혹과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데 대해 국민 여러분에 깊이 사죄드리고 책임을 저야 한다"면서 "수사결과가 무었이든간에 이 문제를 포함,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대통령 수석 비서관 13명과 전 국무위원 19명이 대통령에 일괄 사표를 냈다는 TV뉴스(대통령에 의해 일괄 반려됐다)에 역시 사회 계층은 엄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나라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는 환상에 젖어, 국사모 게시판에 회고록을 연재한 것으로 만족하고, 책으로 출판 하겠다는 욕심은 단념하며, 2003년 9월 15일자 보훈신문에 실린 이덕일의 시론을 전재한다.

  "나라를 빼앗긴 지 채 2달이 되지 않던 1910년 10월 일제는 76명의 한국인들에게 이른바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수여한다. 글자 그대로 제 나라를 망하게 한 데 공을 세운 76명에 내린 훈작이다. 후작(後爵) 6명, 백작(伯爵) 3명, 자작(子爵) 22명, 남작(男爵) 45명에 이르는 이들의 면면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장 높은 직위인 후작 여섯명은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과 이재각, 역시 왕족인 이해창, 이해승, 그리고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에다 순종의 장인 윤태영까지 끼어있다.

  백작 세명은 매국(賣國) 일등공신 이완용과 왕족 이지용, 그리고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린이다. 수작(受爵)을 거부한 13명을 제외한 나머지 훈작자들 모두는 매국(賣國)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지배층들이다. 그런데 이들 훈작자 대부분은 당시 집권당이던 노론(老論) 출신이다. 1921년 일본측 자리에서 "조선독립소요사론(朝鮮獨立騷擾史論"이란 책을 쓴 복명유생(覆面孺生)은, 훈작자 중에 야당이었던 소론(小論)이 적은 것을 문제 삼으며, "당시 재상 이완용은 노론의 거두요, 소론으로는 단 한 사람 조중응(趙重應)이 있으나 중(重)하지 않고...70여 인의 수작자(授爵者)는 조중응 외 한두 사람의 소론을 제하고는 모두 노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왜 노론 출신 독립 운동가가 없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집권 노론의 자리에서 이른바 한일 합방은 국왕만 한인에서 일본인 국왕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집권자)들은 여전히 집권세력이었다.
  반면 양반 출신 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은 국만(國亡)에 책임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소론과 재야 남인(南人)이었다.

  소론의 대표적 가문인 우당 이희영 6현제는 전재산을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이희영을 비롯해 5형제가 순국하고,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 되면서 막내 이시영만 살아서 귀국한다.
   남인으로는 이희영 형제들과 만주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이끌던 안동 출신 이상룡과 김대락 등이 있는데, 이들 역시 독립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사라진 것은 해방과 동시에 정리 되어야 할 이들 노론이 여전이 집권세력의 위치를 차지하면서부터다. 특권은 누리되 의무는 지지 않는 조선 양반의 악폐를 그대로 답습한 이들 노론은 한국전쟁에서도 아무런 희생자를 내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전선에서 죽어가던 병사들이 배경이 없어 죽는다는 뜻으로 "빽"이라 외치며 죽어갔다는 일화에세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전사자는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민초들이다.

  나는 우리가 처한 운명을 우리 민족이 겪는 수난사(受難史)요, 역사적인  당위성(當爲性)에 공동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덕일은 역사성을 거부하고, 한정적인 계층(民草)이 겪는 부분적인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데 그의 시론에도 일리는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니, 양반은 특권층이오, 부유층으로 불리고, 민초는 빈곤층으로 부른다. "소도 어덕이 있어야 비빈다"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나는 내가 살아온 74년의 세월과 경험을 자서전으로 써서, 국민과 과거를 모르는 젊은층에게 알린다는 심정으로 전국의 유명 서점에 배본하여 참고토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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