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노병의 독백 - 색깔 다른 배급통장

[6] 노병의 독백 - 색깔 다른 배급통장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6] 노병의 독백 - 색깔 다른 배급통장

0 2,794 2003.08.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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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병의 독백 - 색깔 다른 배급통장

일본은 130여 년 전(1867) 명치천황이 즉위하여 유신을 선포하며 천황의 권력이 강화되자 군사력이 팽창하며 국력이 신장되고, 아들인 대정천황을 거쳐 손자인 소화천황대에 이르러선 침략 정책이 노골화 된다. 1910년에 일본은 이웃나라인 조선을 합방(合邦)하고, 중국을 침략(1931)하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 하여 동아의 여러 나라는 같은 운명이라고 해서 동남아 각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일본의 남진 정책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영국에 의해서 경제활동을 봉쇄당하고 남태평양의 해로길이 막히자, 동남아 제국(諸國)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서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며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세계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1939.9.3)이 발발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며(1941.12.8), 자의던 타의던 세계 여러 나라는 전쟁에 휩쓸림으로써 모든 나라의 생활 조건은 어려워진다.

우리의 상식으론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가 어떻게 미국과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하게 되나, 전쟁은 국민이 하는 것으로 초기에 타격을 입으면 국민의 염전사상이 확산되어 전쟁은 조기에 끝나지만,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면 전쟁은 의외로 장기화 된다.

이와 같은 예는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다음해 1월 여순을 함락시키고, 5월엔 일본해에서 러시아 해군을 대파하고, 9월에 일로강화조약(日露講話條約-portsmouth條約)을 체결함으로서 2년 만에 일로전쟁이 끝난 선례가 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일본은,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 일본과 한국은 한 나라(內鮮一體)이며, 같은 조상(同根同祖)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국사람 중 일본 식민지 정책을 찬성하는 사람을 천황의 아들(赤子)이라고 부르고, 반대하는 사람을 돼먹지 않은 사람(不逞鮮人)이라 부르며 차별 정책을 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열(優劣)이 가려져 있어, 일본 사람이 한국에 와서 고급 관료나 기관장을 하는 것은 1등 국민이 하는 직업이오,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의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는 하급 관료나 자영업을 하는 것은 2등 국민이 하는 직업이고, 한국에 와서 호떡 장사나 중국 요리 등 음식점업과, 양배추와 호파 등 농사를 짓는 것은 중국의 쿠리(苦力-하급 노동자) 출신이 하는 3등 국민의 직업으로, 먹고 입으며 생각하는 것이 민족에 따라 애초부터 다르다는 논리로, 일본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자존심은 대단하다.

일본 사람은 회사에 출근할 때면 양복과 작업복을 입었으나, 집에 있을 땐 일본 옷(하오리, 하카마)과 나막신(게타)을 신고 , 목소리도 바리톤 목소리로 높이며, 고요한 움직임에 침착한 행동으로 위엄을 보이는 데, 이와 같은 행동은 식민지에 군림하는 일본 사람의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배급 통장도 일본 사람의 배급 통장은 표지가 빨강색, 한국 사람의 배급 통장은 파란색으로, 빨강색으론 설탕을 살 수 있으나, 파란색으로는 불가능하며, 배급량도 일본 사람은 하루에 4홉 8작 9재의 배급 양(量)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하나, 한국 사람은 2홉 3작 8재로 살아가기엔 양이 모자란다.

한국에선 봄에 모를 심으면 자라나는 벼를 보고 가을에 쌀로 받는 입도선매(立稻先賣)라는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어, 쌀 한 가마니에 100원을 쳐서 미리 돈을 맡기고 가을에 쌀로 받는다. 1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양곡의 배급량도 쌀이 60%에 잡곡이 40%의 비율이지만, 보리쌀은 기름을 뺀 납작 보리쌀이오, 때때로 만주에서 수입한 콩깻묵을 보리쌀 대신 배급을 한다.

1941년 7월이다.

소양강 다리 건너 우두리 마을에 사는 농민이 돈이 아쉽다며 돈 200원을 빌려주면 가을에 쌀 두 가마니로 갚겠다는 애원에, 상호 어머닌 쌀을 살 수 있다는 욕심에 돈 200원을 꾸어주고, 같은 해 10월부터 상호 어머니와 상호는 밤중에 소양강 다리 건너 농민의 집을 찾아가서, 쌀값을 주었으니 수확한 쌀로 갚아줄 것을 요구했으나, 해가 바뀌고 새해가 돌아와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쌀도 못 받고 돈도 못 받는다.

상호 친구인 아랫마을 승호(金勝鎬) 할아버진 쌀가게를 하고 있어, 쌀 배급소로 지정되어 식량 걱정을 모르며,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나왔다는 승호 아버진 금융조합(農業銀行의 前身) 사무실에 나가는 낮 시간보다 기생집에서 보내는 밤 시간이 더 바쁘다.     

일본 사람의 집은 담장 없는 조그마한 목조 건물의 네모진 2층 집이며, 한국 사람은 담장이 있고 마당이 넓은 초가집이나 기와집으로, 한국 사람이 들여놓는 의걸이 장롱과, 일본 사람의 붙박이 장롱은 겉으로 보기엔 한국 사람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정반대다.

60년 전 강원도 춘천에서 보았던 일본의 생활상과 생활 집기를, 60년 후인 1987년 봄에 일본 쿄토(京都)의 농촌에서 확인하고, 골동품 점에서 도자기를 감상한 상호는, 생활 풍습과 생활 집기는 금전의 다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활 풍습에서 오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느껴진다.

경찰 당국은 누가 국가 원수인 일본 천황이나, 행정 수반인 조선 총독과 악수를 하고, 누가 일본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느냐에 따라 경찰서에서 예우하고 견제하는 방법이 다르다.

상호가 식민지라는 막연한 개념을 실상으로 확인한 것은, 1998년 마카오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 같으면 전기회사나 구청에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집골목에 얼기설기 전기 줄이 엉키게 방치하지는 않을 텐 데, 마카오 당국은 주민의 세금을 걷어서 본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식민지 통치를 받는 현지 주민의 생활상은 관심 밖이다.

註 1. 일본식민지 하에서 일본 사람이 받는 식량 배급량은 1일 1인 당 4홉(合) 8작(勺) 9재(才)요, 한국 사람은 1일 1인 당 2홉(合) 3작(勺) 8재(才)다.   
2. 홉(合)은 되(升)의 10분의 1이오, 작(勺)은 홉(合)의 10분의 1이며, 재(才)는 작(勺)의 10분의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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