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노병의 독백 - 현역군인-練武野史

[29] 노병의 독백 - 현역군인-練武野史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29] 노병의 독백 - 현역군인-練武野史

0 3,069 2003.08.24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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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노병의 독백 - 현역군인-練武野史

鍊 武 野 史

상호는 훈련소 교관단에 근무하면서 일요일이면 근처 명승지와 사적지(史蹟地)를 순례하며 모자라는 상식을 보충한다.

육군 제2훈려소. 100만 대군의 요람지답게 평야와 곡창지로, 싸움터로 과거부터 전쟁에 얽힌 얘기와 초야에 묻혀 전해오는 전설과 설화가 많다.

백제의 마동과 신라의 선화공주에 얽힌 얘기, 황산벌의 대격전 에서 백제의 계백(階伯) 장군과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에 얽힌 이야기, 후백제의 견훤(堅萱)왕과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 얽힌 이야기 등 예로부터 이곳엔 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다.

고려 중엽부터 일어난 풍수지리 사상은 명산 대지를 찾아 집터나 묘지를 쓰면 당대에 자손이 잘되고 본인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는 학설이다.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 말엽에 승려 무학대사가 ‘이성 계’ 장군이 왕으로 등극을 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이후, 고려가 망하 고 조선이 창건되며 ‘이성계’ 장군이 태조로 등극하고, 조선 말엽엔 왕족인 ‘이하응(李昰應)이 지관(鄭萬仁)이 충남 덕산의 한 절터가 2명의 황제가 나올 명당자리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지를 충남 덕산면 가야산으로 이장 (移葬)한다. 1965년 12월 아들이 없던 철종(哲宗) 뒤를 이어 흥선군의 아들 재황(載晃)이 고종(高宗)으로 등극하자,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이 되고, 고종의 아들 척(拓)이 순종(純宗)으로 등극하니, 대원군의 집안에서 지관의 말대로 2명의 황제가 나온다.

이때부터 풍수지리 사상은 민간을 침투해 꽃을 피운다.

달나라에 여행을 간다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풍수지리 사상은 일반 대중 속 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생전엔 부모에게 효도를 모르던 불효자 가, 부모가 죽은 뒤엔 자신과 후손을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고 명당 과 대지를 구하려는 사람이 기승을 부린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유명한 정치인이, 선조의 묘를 이장했다는 신문기사가 눈에 띄는 것은, 여전히 민간 생활에 풍수지리 사상이 뿌리박고 있다는 증거다.

훈련소 일대는 예로부터 싸움터로 이름나 있으며, 백제의 용장 계백 장군이 조국의 운명을 걸고, 5만의 병력으로 18만의 나당 (羅唐) 연합군을 맞아 역전 분투한 곳이 이곳 연무대 일대다. 신라군의 내려가는 사기를 북돋기 위해 16의 어린 나이로  단신 백제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계백 장군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화랑 관창이 전사한 곳이 이곳 황산벌이며, 육군 제2훈련소가도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흡연(翕然)하니...,”하고 노래하고 있다.

연무대 일 대가 예로부터 100만 대군의 요람지답게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 전해오는 전설이나 야사 또한 흥미롭다.

연무대 중앙의 본부 자리는 그 일대가 금계포란지지 (金鷄抱卵之 地)로 불리며, 늙은 소나무와 당대발복 (當代發福)을 바라고 시신 (屍身)을 암장(暗葬)한 임자 없는 무덤이 풍수지리설을 웅변하고 있다.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정확한 위치를 찾아 풍수지리와 산천의 흐름, 지세의 변화를 연구했다는 지관(地官)들이 예로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곳인 데, 지관도 아닌 젊은 공병장교가 훈련소 자리를 이곳에 잡았다.

연무대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동쪽 1Km에 작은 산이 있으며, 산정(山頂)에는 작은 왕릉이 있다.

이 왕릉은 10세기(935. 9) 초에 후백제가 망하던 날, 왕이던 견훤이 고향이 그리워 완산주(全州)로 가다가 지병인 등창(背瘡)으로 사망하자, 부하들이 그 자리에 시체 를 묻은 곳이 이 왕릉이라고 하며, 지금도 그 후손이 왕릉을 관리 하 고 있다.

많은 아내를 두었던 견훤은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물려주려 하자, 어머니가 다른 장자 신검 (神劍)이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니, 왕건은 신검을 죽이고 후백제는 멸망했다.

왕릉 발밑엔 강경 평야가 있고, 서쪽으로 10리 밖에 마한의 고도 금마가 있다.

금마엔 훈련소 후반기의 군사훈련을 가르치는 제27 교육연대가 있고, 위병소 문밖엔 미륵사지(彌勒寺址)와 미륵탑 (彌勒塔)이 있다.

옛날 마동(馬童)의 신화와 전설이 있고, 마동이 신라에 가서 선화공주를 데리고 와서, 제30대 무왕(武王)으로 즉위, 백제를 다스리다가 서기 642년에 붕어(崩御)한다.

동쪽 30리 밖에 봉황산이 있고, 봉황산 산줄기가 서쪽으로 뻗어오 다 연무대 20리를 남기고, 고려 광종 19(968)년 에 승(僧) 혜명 (慧明)이 충남 논산군 은지면 반야산(般若山)에 창건한 사찰(寺刹) 관촉사(灌燭寺)가 있으며, 관촉사 문 밖에는 신장 24,5m의 석불인 미름불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1967년 병자호란(선조 14) 때 청 태조가 이끄는 20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코자 압록강을 건너는 데, 앞에 가는 승려가 물 깊이가 얕은 여울을 따라 건너기에, 오랑캐 병사가 뒤따라 건너다가 물이 깊어 많은 군사가 물에 빠져 죽는다.

이 광경을 본 청나라 장수가 중을 따라가서 칼로 목을 킨 것이, 칼이 쓰고 있던 갓에 맞아 갓 둘레만 물에 떨어졌는데, 미륵불이 있는 충남 논산의 관촉사 승려가 아침에 불사(佛事)를 하러 밖으로 나오다가, 땅 위에 미륵불의 갓 둘레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원상 대로 복원시켰다는 전설이 있는 대, 상호가 본 석불의 갓 둘레는 쇠갈고리로 고정되어 있다.

봉황산 줄기는 은진 관촉사에서 서쪽으로 20리를 뻗어오다 2개의 낮은 언덕을 이뤘으니, 하나는 연무대 본부 자리요, 다시 1000m를 뻗어 댓들(竹坪)이란 언덕을 이루고, 언덕 서쪽은 전라북도요, 동쪽은 충청남도의 경계선을 이룬다.

훈련소 본부 지명은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忠南論山郡 九子谷面金谷里)로, 논산 일대의 촌로(村老)들은 고을 이름풀이를 하며, 남한의 9게 도에서 모여든 젊은이가 신병으로 훈련을 받고 나면, 완전한 군인이 되어 전후방 각 부대로 흩어지고, 부락은 군사 도시로 경제활동이 활발하며, 훈련병을 면회 오는 가족이 생활필수 품을 사기 때문에 훈련소 주변의 주민들은 생활이 윤택해진다(金谷 里)고  믿으며,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을 이름과 현재사항의 필연성 을 강조한다.

6.25 사변 초기(1951. 11)에 제주도 모슬포와 충남 논산에서 신병을 양성하고, 논산훈련소가 창설된 지 40여 년이 지났어도 논산 은 아직도 훈련소가 남아있어, 논산하면 훈련소요, 훈련소 하면 논산으로 우리들 기억에는 군사도시로 영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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