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0 3,482 2003.08.1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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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서울로 가는 길

1950년 10월 하순이다.

상호는 공산 치하에서 4개월을 숨어 지내는 데, 9월 28일 서울에서 인민군이 물러가고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상호는 서울로 옿라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나선다.

100리 길을 걸으며 동네 입구마다 보초 서는 치안대원에게 인민군이 패퇴하고 서울이 수복됐다는 말을 듣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서울로 간다니까 통행을 허락한다.

서울로 가려면 걸어서 이틀이 걸리는 데, 온양온천에서 해가 저물어 여인숙에서 하루 저녁을 묵을 때다.

걸어 오느라 피로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곤하게 잠든 한밤중에 상호를 깨우는 인기척에 놀라 눈을 뜨니, 5,6명의 청년이 잠자는 상호를 둥글게 에워싸고 내려다 보고 있다.

불심검문에 걸린 상호는 허름한 치안대 사무실로 끌려가 몸 수색을 당하는 데, 상호 주머니에서 마교리 치안대(馬橋里 治安隊)라는 광목 완장이 나온다.

낮에는 대한민국이오, 밤에는 인민공화국인 불안한 세상에서, 상호는 서울의 치안이 회복됐다는 소문을 들어서 길을 떠났는데, 좀 일렀나 싶어 후회가 앞선다.

상호 주머니에서 나온 마교리 치안대라는 완장을 본 온천리 치안대 사람들은 상호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동지 수고가 많았소” 하며 검문도 없이 상호를 돌려보낸다.               

10월 하순인 데 상호가 천안을 지날 때다.

“내일 아침 oo일보…,”하고 지나가는 소년으로부터 전세가 궁금해서 신문 한 장을 사서 보았더니, 1면에 한국군 부대가 평안북도 혜산진에 도착하여 압록강을 굽어보며, 수통을 기울여 물 마시는 병사의 사진을 크게 싣고, 기사에는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고, 통일될 날도 머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서울로 온 상호가 자취를 하던 용산의 6촌 누님 댁으로 와서 보니, 방안은 어지럽고 살림 도구는 없으며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사직동에서 사는 고종4촌 댁을 방문하니, 효제국민학교 교장을 하는 고종4촌 형은 살아있는 상호를 보고 반가이 맞으며, “나는 마루 밑에서 3개월을 숨어 지내며 살았는데, 식량을 구하러 집을 나선 공직자는 대부분 공산당원에 잡혀서 소식을 모른다”며, 전쟁으로 학교 직원의 소식을 모르니, 상호를 보고 “임시 직원의 신분으로 학교 관리를 위임하니, 숙식은 학교 숙직실에서 해결하고, 학교를 비우지 말라”고 부탁한다.

공산 치하에서 3개월을 지낸 서울 시만은 공산당원에게 죽은 사람, 피난지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 북쪽이 좋아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간 사람으로 거리엔 사람이 없고 공공 막사는 텅 비어 있다.

아침에 배달 된 oo일보를 보니, 평안북도 혜산진까지 북진했던 국군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학교 정문에는 언제 부쳤는지 “EUSAK FOR KOREA USE ONLY”라는 팻말이 붙어 있으며, 옆에 있는 oo보육원 건물에도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

상호는 한국 학교 건물에 왜 미 8군의 징발 표시가 붙어 있는지 불안과 함께 궁금하다.
   
텅 빈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데, ‘헤드 라이트’를 켠 부대 차량이 운동장으로 들이닥친다.

2,3명의 장교가 군화를 신은 채로 숙직실 문을 열더니, “Can you speak English”하며 상호에게 묻는다.

상호는 학교 직원으로서 영어는 안다고 답변하니, 자기들은 인도의 야전군 의무중대라고 하며, 당분간 이 학교에서 주둔한다고 한다.
   
학교 운동장에서 천막을 치고 하루 저녁을 야영한 군 부대는 다음날 아침부터 교실로 들어간다.

상호는 그들의 임무는 모르나, 부대에선 상호를 제외한 일체의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저녁이 되니 인도군 병사는 양담배(lucky strike)를 가지고 와 “watch…,watch”하고 외친다.

아마도 양담배와 시계를 교환하자는 뜻일 게다.

다음날 아침 입교를 거부 당한 이(李啓熏) 선생을 정문에서 만나 간밤에 있었던 인도군 병사와의 대화를 얘기 했더니, 이 선생은 무릎을 탁 치며, “내가 밖에서 시계를 공급할 테니 박 선생은 안에서 시계를 파시오”라고 한다.
   
이 선생은 단신으로 월남해서 고학으로 서울대학 음악과를 나와 효제 국민학교 음악 선생으로 근무하는 38 따라지다.
   
시계(세이코 7석) 5,6개를 가져온 이 선생은 6,000원을 줬으니 2배는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녁에 “양담배”를 들고 온 인도군 병사에게 인지와 중지를 펴 보이니 아무 소리 없이 양담배 두 보루를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 팔자에 없는 담배 장사를 했더니, 아랫목 이불 밑에는 양담배가 수북이 싸였다.

아침에 자고 나니 언제 갔는지 인도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학교는 썰렁하다.

청계천에 나가 담배를 현금으로 바꾸니 50만원인 데, 반을 이선생에게 주고 나니, 25만 원이 남는다.

당분간의 용돈은 되겠다고 생각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담배를 판 25만원은 상호가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경남 고성으로 내려가서, 국민방위군 교육대에 잇는 5개월 동안의 생활 기금이 되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13일 아침이다.

이 선생이 찾아와서 내일 아침 8시까지 ‘탑골’ 공원으로 모이라는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 데, 피아노가 그리워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치고자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이 선생은 하루 종일 건반을 두드리며 혼자서 흥에 도취하고 있었다.

상호가 이 선생이 치는 음악의 내용을 모르겠다니까 매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던 군가를 친다.

“사나이 20여 세 꽃이 피는 이 가슴, 내일은 싸움터로 찾아들 가세, 희망도 하소연도 무슨 소용 있으랴, 이것이 우리 청춘 갈 곳이라네” 하는 청춘가다.

혜산진까지 북진했던 국군이 압록강을 굽어보며 남북통일의 보람찬 꿈을 생각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략상 후퇴를 강요당하고, 젊은이 모두가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전선으로 달려가고, 53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호는 이 선생의 소식을 모르니, 아마도 전쟁 중 전방으로 가서, 인민군과 싸우다 적탄에 맜고, 국립묘지에 누워서 편안히 쉬고 있을 게다.

1950년 12월 18일 새벽이다.

숙직실에서 상호 혼자 잠을 자고 있는데, 새벽에 학교 담을 넘어 용산에서 사는 6촌 매부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상호에게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데, 아침 10시까지 용산 효창국민학교로 침구를 가지고 나가라"고 한다.

서둘러 덮고 있던 이불을 말아서 배낭에 넣고, 배낭을 짊어지고 연건동에 사는 고종 4촌집으로 가서, 4촌 형에게 제2국민병 소집장이 나와서 아침 10시까지 용산 효창국민하교로 나가간다고 작별 인사를 한다.

“4촌 형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난번에 피난을 안 가서 잔류파로 몰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사상을 의심 받아 고통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중공군이 참전해서 또 후퇴를 한다니, 남보다 먼저 피난을 가서 잔류파로 몰리지 말아야 하겠다며, 자기도 곧 뒤를 것이라고 한다.

상호는 작별 인사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용산 효창국민학교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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